Sunday, April 26, 2020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건 내 자신과 그림이길 바라며 2020

2019년을 마치면서 그림에 관한 글을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실은 두개의 다른 글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둘다 회화의 emo-스러움, 즉 어떤 뭐랄까..회화의 존재론적 이유랄까….를 다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하나의 긴 호흡으로 쓸까 한다. 이게 미래의 내가 다시 읽어봤을 때 어떤식으로든 초심으로 돌아가게끔 도와주는 글이였으면 한다. 

몇년전의 쓴 글에 ‘그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데, 내가 그림을 배신하게 될까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라는 구절이 있다. 뼈를 때리고 공감이 가게 만드는 과거의 나의 통찰력에 지려버리는 지점이다. 두발로 땅을 딛고 두눈으로 세상을 보고 두손으로 그림을 만들고, 그리고, 부수고, 흘리고, 문지르고… 내 몸과 맞닿아 있는 이 육체적 수련아..아니, 수련이었던 적이 있긴 했던가? 수련이란 게 애초에 무엇인가? 기공을 단련하고 바늘무덤위에서 잠을 자는 거 아닌가? 정확한 측정법이 없어서 내가 그토록 처절했던 적이 있긴 했는지 확신이 안 든다. 하나 확실한 건 뭉친 근육을 유연하게 만들려면 일단 스트레칭으로 조져서 존나 아파야 하는 것 처럼 그림 또한 성장을 위해선 일정치의 정신적, 육체적 단련과 고통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휴먼 활동이 그럴 것이다. 심신 중에서도 심의 단련, 즉 사고의 확장이 어떻게 회화적 언어로 변환되는지 그리고 그 고유의 가치들이 얼마나 나와 지구에 있어 존재론적 숙명처럼 느껴지는지...스스로의 말빨과 필력에 대한 상당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여기에 써내려가 보도록 하겠다.

본좌는 대학원을 들어온 후로 그림이란 단어를 공전하는 생각을 상당 부분 바꿔야 했다. 아예 유턴을 한 정도는 아니고 차선 바꾸기 정도? 내 어깨에 짊어진 회화의 비극적 역사를 원망할 즈음 어쩌다 들어간 학부생 위주의 수업에서 흥미로운 점을 여러가지 포착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였던 것은...시니컬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그림이였다. 나보다 고작 몇살 어린 20살 언저리의 그림이란 대부분 자기표현이라는 단어를 빌어 어떤 제스처가, 어떤 색깔이, 어떤 상징이 자기의 아픔이나 트라우마에 대한 해설이 되는지 설명하는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 한다. 예를 들면 검정은 절망, 갈긴 터치는 분노, 두개의 상으로 어린 자화상은 두개의 자아… 페 르 소 나 …지금도 예전에도 작가생활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어린 시절 비슷하게 통속적이고 유치한 어법을 구사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느낌을 맹신하는 1인으로서 이런 현상을 마냥 유치찬란 하다고 웃어넘기기 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더 위대한 대리명분을 내걸고 벌어나는 예술활동의 기저에는 다 이런 심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무의식은 정말 빨강을 분노로 보고 있는 걸까? 소위 말하는 특정 시각정보의 고유한 “느낌” 은 절대 무시할만치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 느낌이라는 칼을 연마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담금질을 해야할까. 조금 더 흥미로운 자아를 제시하기 위해서 어떤 덕목과 사색이 요구될까? 아마 3종류 이상의 위치 추적을 해야할 것이다. 자아의 물리적 (공간적), 시간적, 심리적 좌표 찾기. 그리고 이 위치추적의 결과는 인간에 관한 어느 이야기처럼 거짓도 진실도 아닐 것이다. 대답 자체 보다는 사고의 확장에 중점을 둬보자. 

1. 나는 어디에 있는가:

친구에게 너 지금 어디야? 라고 물어보면 밖이야.이태원이야. 침대에 누워있어. 등등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조금 더 시야를 확장해볼까? 아니면 시야를 아예 축소시켜 보자. “나 냉장고랑 앞에 (in front of) 있어.” “나 북한과 제주도 사이 (between) 에 있어.” “나 하늘 아래 (under) 있어.” “나 엄마 자궁 바깥에 (outside) 있어.” “나 예수님 품 안에 (in) 있어.” “나 너 옆에 없어. (not present)” 등등… 상당히 다양한 추상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나의 정확한 물리적 위치를 파악하고 거기에서 오는 각종 물리적 체계를 인지 하고 있을 것. 


2. 나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이것 또한 물리적 위치 파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조금 더 추상적이랄까…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걸까? 과거의 시체를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미래의 토양분이 될 날을 살고 있는 건가? 나는 2219년보다 200년 전의 시간을 살고 있나봐. 아니지,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427년 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 뿐이다. 아니지, 나는 엄마아빠가 섹스를 하고 나를 잉태한지 약 9490일 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란 게 단선적인 개념이긴 한걸까. 60개의 초가 모여 1분이 되고, 60개의 분이 모여 1시간이 되고, 60개의 시간이 모여 60시간, 그리고 시간이 지층처럼 켜켜이 쌓이고 쌓여 완성되는 60년의 12간지...어제와 나와 내일의 나는 시간이라는 그래프 속에서 같은 좌표에 사는 같은 인간이 맞을까? 이 모든 질문 안에 숨은 단서의 점들을 이어서 시간을 4차원적 선분으로 인식할 것.

3. 나는 무엇으로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오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제 6의 감각의 존재가 있다고 치고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 감각과 기억의 가장 주요한 소스는 무엇인가? 나는 뇌의 주름에 낀 미끈미끈한 액체로 세상을 구현하고 있나? 간밤에는 팬티에 묻은 분비물로 꿈을 꿨나? 내 아랫도리에 들어갔다 나온 인간의 표피가 나를 주물하고 있지는 않나. 아니면 당신이 언젠가 들었던 말이 당신 감각 체계의 중추에 있진 않은가. 오늘 자른 손톱으로 느꼈던 어제의 감각들은 진짜일까? 내 안에 있는 것, 내 밖에 있는 것, 버려지는 것, 다시 자라나는 것, 아예 있지도 않았던 것, 영원히 가지고 가야 하는 것...귀지를 파낼 때야 내 귓속 모양을 짐작할 수 있는 것 처럼 내 몸을 아우르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감각기관들이 총체적으로 나라는 닝겐을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것.

이 정도가 내가 생각해본 ‘느낌’을 단련하는 방법들이다. 이 질문들에 대답을 하다보면 추상적 자아 확장에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내가 느끼기에 대부분의 시각 미술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분석하고, 정의하고, 부정하고 그리고 그 모든 답변의 경계를 흐리는 일이다. 이런 배경이 너무나 흔하게 남용할 수 있는 미술적 용어, ‘adrift body in space’ 가 탄생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짐작한다. 인간은 모두 공간과 시간 속을 떠도는 한낱 분비물 제조기, 무지한 고깃덩어리. 출처가 불분명한 자극과 감각만 넘쳐나는 삶의 와중에 당신은 희망적일 것인가, 패배적일 것인가, 투쟁할 것인가, 인내할 것인가? 

회화의 한계점이자 가장 큰 매력이라면 이 모든 추상적, 철학적 “느낌”을 평면에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손과 평면 (surface) 하나만 두고 일어나는 매력적인 수련 그리고 빌드업.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평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 회화의 시작과 끝은 이 납작함, 평면, 표면에 마법처럼 일어나는 유희. 느낌으로서 존재하는 불분명한 시각정보들을 나비처럼 날아올라 카멜레온처럼 낚아채 물질화 시키는 것. 그런 평면성에 기인하여 의례적으로 쓰이는 단어… 매핑 mapping. 어떤 정보를 시각정보로 변환 하는 것. (사전적/수학적 의미론 연관성을 관계하여 연관시키는 것 혹은 해당 값이 다른 값을 가르키게끔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과거 서구가 미지의 세계를- 말 그대로 terra ingonita- 매핑했던 것에서 현대의 회화도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어떻게 보는가 (상상하는가.)” 란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그림에 확신이 들지 않을 때마다 스스로를 위한 나침반으로서 테라 인코그니타를 생각한다. 단서가 없는 세상에 어떻게서든 단서를 만들어낸다.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매핑은 뭐가 있을까? 다이어그램과 상형문자 그리고 Cabinet of Curiosity 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요새는 지형과 지세를 나타낸 이미지 (topography) 와 현미경 비전 (micrscropic vision), 그리고 구글 스트릿뷰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첫번째는 큰 지형을 색종이 처럼 접고 접어 시야에 담기게끔 매핑한 것. 두번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미친듯이 크게 확대해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매핑한 것, 세번째는 일상의 공간을 납작한 디지털 공간으로 매핑한 것...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물음 ‘어떻게 보는가 (상상하는가.) 이 과학적 언어들의 공통점은 애초에 평면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프레스기에 넣고 납작하게 눌러버리듯 평면으로 변환 했다는 점이다. 토포그래피의 사전적 의미로 Surface 에 관한 학문이라는 뜻이 포함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짜릿하던지. 회화의 surface (평면) 와 지구의 surface (표면). 얼마나 흥분 되는 평행우주인가!! 나는 회화의 평면을 다루면서 지구의 살을 더듬는 느낌을 받는다. 그건 지구를 향한 나의 짝사랑을 고백하고 프레스기로 눌러 평면으로 만들고 매핑하는 일. 이 얼마나 로맨틱한 회화의 자세인가...

지구와 평면과 손 (hand AKA 나) 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figure and ground 를 또 빼먹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미술 용어가 영어가 어원인 것이 유감이다. 이는 그대로 피겨-그라운드로 직역되기 하고 사물-배경 이라는 뜻으로 의역 되기도 한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의 주제부와 배경으로 국한되기에는 너무 포괄적인 단어다. 주제부와 배경은 명확한 묘사와 관계정립을 위해서 흔히 쓰이는 말인 반면 피겨-그라운드는 각 공간의 관계성에 더 초점을 준다. 우리가 평면 안에서 어떻게 앞과 뒤를 분간하고 지각하는지...이는 색, 형태, 공간, 다 열거하기 힘들만큼 다양한 요소에 있어서 결정 되는 굉장히 유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화에는 피겨-그라운드가 반드시 있다는 점을 꼭 알아야한다. 그것은 그림의 구성요소에 있어서 아틀라스가 지구를 받치고 있듯 무언가 큰 바탕이 되는 요소와 상대적으로 기대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식 하는 것이다. 나는 회화의 이런 운명이 꼭 정말 피겨-그라운드, 말 그대로 사람과 지구의 관계를 뜻하는 것 같다. 두발로 땅 (ground) 을 딛고 사는 내(figure)가 또 하나의 figure-ground 를 평면(surface) 에 매핑한다는 것. 이 용어들의 어원이 어떻든 나는 필연적으로 그림 그리기의 숙명이 지구와 인간의 숙명과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동굴벽화처럼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그림그리기. 비가시적 공간을 살로 더듬어 납작한 공간에 그려내는 이야기. 

어느 례술활동이나 특정 수치는 그렇겠지만 특히 회화는 쓸모없고 바보같고 소모적이고 원시적이고 세련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초딩 코딩 교육이 아닌 의무화 되고 로봇이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시대에 왜 그림을 그리냐고. 나는 이 질문들에 몰리 주커먼의 ‘95 theses on paintings’ 을 곱씹는다. 회화의 본질은 어리석음 그 자체에 있으며 그것을 인지한 채 추구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모든 사람이 어리석지 않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똑똑한 바보가 돼야 하는 그림 그리기 ! 어렵다, 어려워. 필연적인 듯 보이는 회화라는 매체의 존재론적 고찰! 물리적 평면에 변환되는 나의 좌표 정보 xyz! 사람은 모두 외롭고 사랑을 해도 외롭다. 내가 유일하게 외로움을 달랠 길은 이 변환법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0년에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자. 내가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그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Friday, February 17, 2017

150523

좋은 그림을 만들기 힘든 이유는 인류의 보편성을 아우르고 있으면서도 특정의 주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포괄적인 동시에 가장 자세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Saturday, February 11, 2017

170211 예전에 써놓은 글

스쿠버 다이빙 입문할 때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부력 조절입니다. 배꼽을 바다 바닥에 누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부동자세로 몇초 기다리면 상체부터 공기가 가득 찬 비닐 봉다리 처럼 서서히 뜨게 됩니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깊게 내쉬면 다시 상체부터 가라앉게 됩니다. 아주 간단하게 숨을 들이쉬고 마쉴 뿐 인데, 이 때면 나는 공기, 폐, 부력 같이 직접 만져본 적도 없는 것들의 존재를 실감하게 됩니다. 새빨간 페의 점막에 투명한 공기가 닿아 부력이라는 것이 작용하는 걸 생각해보세요.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채우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호흡 요령을 익히면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비교적 수월해 집니다. 군더더기 없이 살짝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만으로 더듬어 본 적 없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좋은 그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에 그린이의 성품이 비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림에는 그린이가 아는 것들이 몽창 들어갑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좋은 그림이 무어냐고 물으면 나는 그린이가 아는 것 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 그리고 그 사이 간극의 모든 불명확한 것들이 다 서려있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무지와 무지의 체화는 이리 다릅니다. 그런 것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들이마쉬고 내쉬는 법을 깨우치는 것. 채우고 비우는 법을 깨닫는 것.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나를 채워놓았다가 남들에게 텅 빈 모습까지 주는 것. 그렇지만 어설픈 무결이나 작위적인 공허는 허용하지 않을 것. 나는 틈틈히 그려 나를 가득 채워 놓아야 할 것입니다. 한방울만 더 담으면 물 쏟을 바가지 처럼. 그건 그리는 사람의 성품을 곱게 유지하는 일. 그리고 어느새 다 비워 다시 상체 떠오르면 새 풍경 볼 것이고 또 그것을 담아 공허함을 채우면 됩니다. 그것은 좋은 그림을 만드는 일. 심해를 용이하게 유영하는 법을 익혀도 다시 찾아올 적막이 고될 것을 알기에 자주 허무하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