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February 17, 2017

150523

좋은 그림을 만들기 힘든 이유는 인류의 보편성을 아우르고 있으면서도 특정의 주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포괄적인 동시에 가장 자세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Saturday, February 11, 2017

170211 예전에 써놓은 글

스쿠버 다이빙 입문할 때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부력 조절입니다. 배꼽을 바다 바닥에 누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부동자세로 몇초 기다리면 상체부터 공기가 가득 찬 비닐 봉다리 처럼 서서히 뜨게 됩니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깊게 내쉬면 다시 상체부터 가라앉게 됩니다. 아주 간단하게 숨을 들이쉬고 마쉴 뿐 인데, 이 때면 나는 공기, 폐, 부력 같이 직접 만져본 적도 없는 것들의 존재를 실감하게 됩니다. 새빨간 페의 점막에 투명한 공기가 닿아 부력이라는 것이 작용하는 걸 생각해보세요.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채우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호흡 요령을 익히면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비교적 수월해 집니다. 군더더기 없이 살짝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만으로 더듬어 본 적 없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좋은 그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에 그린이의 성품이 비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림에는 그린이가 아는 것들이 몽창 들어갑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좋은 그림이 무어냐고 물으면 나는 그린이가 아는 것 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 그리고 그 사이 간극의 모든 불명확한 것들이 다 서려있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무지와 무지의 체화는 이리 다릅니다. 그런 것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들이마쉬고 내쉬는 법을 깨우치는 것. 채우고 비우는 법을 깨닫는 것.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나를 채워놓았다가 남들에게 텅 빈 모습까지 주는 것. 그렇지만 어설픈 무결이나 작위적인 공허는 허용하지 않을 것. 나는 틈틈히 그려 나를 가득 채워 놓아야 할 것입니다. 한방울만 더 담으면 물 쏟을 바가지 처럼. 그건 그리는 사람의 성품을 곱게 유지하는 일. 그리고 어느새 다 비워 다시 상체 떠오르면 새 풍경 볼 것이고 또 그것을 담아 공허함을 채우면 됩니다. 그것은 좋은 그림을 만드는 일. 심해를 용이하게 유영하는 법을 익혀도 다시 찾아올 적막이 고될 것을 알기에 자주 허무하면서도....

Thursday, February 9, 2017

170128  

나는 그림에 변치 않을 사명감과 확신이라도 있는 것 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의 재능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첫째로 미술을 꼽기는 고사하고 "취미이자 특기 그리고 남다른 재능은 그림에 대해 좆또 모르면서 아는 척 하기, 스스로도 안다고 믿기, 저주받은 통찰력으로 자기비난하기 그리고 잇따라오는 자기연민에 모든 스태미나를 투자하고 정작 중요한 일들에는 나자빠지기 입니다." 라고 대답 하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의심도, 회한도 많다.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는 것을 평생 해나갈 자신 또한 없다.  무슨 일이 있든, 무엇을 느끼든 나는 묵묵히 그림을 그리면 된다는 다짐이 언젠가부터 무거운 짐이 되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찜찜하다. 미술에 인생이라도 바칠 각오가 있는 것 처럼 굴다가 단순 변심을 계기로 그림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십년 후를 생각하면 좀 비참하고 좀 씁쓸하고.......미래의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라도 현재의 나는 타협한 미래의 내가 한심스러워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야마가 도는 것이다. (나색기 새치혀를 나불 거리는 게 특기이더만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림은 들인 마음과 시간과 노력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배신해버리면 나는 얼마나 비열하고 가진 것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가 싶어 항상 마음 한구석 잠재적 범죄자처럼 살고 있다.

행복할 때 슬프기. 어려울 때 쉽기. 숨 쉬고 참기. 달리면서 잠들기. 눈 감고 세상 읽기. 언제나 양가적인 감정들은 나를 힘들게 하며, 나는 아직도 그런 상황들을 다루는 게 능하지 못 하다. 밤이고 낮이고 맨몸으로 사막을 종횡무진 하는 느낌이다. 인간적으로 다 떨어진 샌들 정도는 줬어도 되는 거 아닐까? 뜨거웠다 차가웠다 하는 사막의 온도차에 피부가 벗겨지는 게 지긋지긋 해서 몇번 사람에도 기대 봤다만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무력한 본인의 모습이 존나 꼴 사납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나의 구원자로 삼으려는 미련함을 굳이 행동으로 증명해 가며 또 다시 비참할 필요가 없다는 것. 다시는 사람의 외로움을 사람으로 달래지 않겠다. 사람을 나의 우상으로 삼지 않겠다. 거짓말인 걸 스스로도 뻔히 알면서도 몇번이고 괜히 하게 되는 말이다. 내가 하는 말들이 대게 다 그렇다. 헛우스개 소리. 헛다짐, 헛비난, 헛위로......다 헛헛한 개소리.

사람들은 무슨 작용을 바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누구는 외로워서, 누구는 말하고 싶은 게 많아서, 누구는 사회를 바꾸고 싶어서, 누구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싶어서. 우습게도 각종 구실과 대의명분을 막론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건 일종의 수치플이다. 이건 그리기의 "이유"가 아니라 "숙명"일 수 밖에 없다. 그림이 수치의 영역에 내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A=사람에 따라 부르는 말은 제각각. 편의상 사바세계라고 하자.




B=수치로 귀결되는 환장 인간사 컴파운드.




C=여집합. ( 여집합이 대체 뭔데?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사실 그냥 A=B 이고 여집합은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근데 이렇게 생각하면 살 맛이 별로 나지 않으니 기각)



 D=좋은 그림




나는 부끄럼쟁이라 종종 별것도 아닌 것부터 시작해 나를 통째로 숨기기도 한다. 누구든지 한번은 그랬으리라. 그렇게 수치를 대충 꾸겨 마음 어딘가에 쳐박아 두는 것이 습관이 되니 공간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일정량의 수치를 공개해야 할 필요를 느꼈으니, 진솔하게 그림에 다가간다는 것은 미련함, 멍청함, 거짓말, 속임수, 그리움, 외로움, 모순, 분노, 열등감, 허영, 질투, 욕구, 약점, 혐오, 원죄, 쥬금(!) 그 외 등등 모든 종류의 부끄럽고 약한 것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줄 용기를 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 그림이라는 것은 한사람이 온전히 담겨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사바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나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을 신념이 있다. 그림이 그러기 위해선 위에 명시된 것들을 직접적으로 제공할 필요는 없지만, 언제든지 제시할 수 있는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상이 념을 아우르냐 아니면 상이 념에게 종속 당하냐의 차이다. 상이 념을 아우르면 이미지가 종식되지 않는다. 끊임 없이 새로운 맥락으로 순환 한다. 반면 념이 우선시 되는 이미지는 맥빠지는 완성품일 뿐이다. 논리를 따지는 이미지에는 비논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내 그림이 저런 영역에 발이라도 들이밀 날이 오긴 할까? 재능은 고사하고 나에게 그런 역량이 있긴 한 걸까? 나는 바다에 뛰어드는 개구리가 아닐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 답이 없는 질문에 매번 낙담하는 것이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한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 또한 지긋지긋하다.

나는 아직도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부끄럽다. '제가 이렇게 병신입니다.' 라는 문장을 최소 단위로 잘게 간 후 적당히 재조합해서 보여주는 느낌이다. 안녕하세요, 최대한 솔직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너무 가까이 오진 말아주세요, 부끄럽습니다. 시각예술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노출증 환자마냥 벗어 제껴야 하는 미덕에도 불구하고 머뭇머뭇 그럴듯하게 치장을 해야 한다는 묘한 영역에 위치해 있다. 왜 나는 완전한 누드 김밥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한 빡침과 수치심이 또 다시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것을 매번 체감하며, 어쩔 수 없이 직면하는 닝겐의 굴레인 것일 테니 그 한계치 안에서만이라도 최대한 진솔하고 최대한 수치스럽다면 마음을 비추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미약하게나마 직은 신념을 가져 본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왜?" 라는 질문을 간간히 받는다. 하기 쉬운 대답으론 "재밌으니까.", "이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냥 옛날부터 해와서 자연스럽게." 기타 등등이 있다. 그날 그날 입맛따라 상대방 따라 적당히 골라서 대답하면 된다. 결국은 내 모습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투영되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대답을 달리하면 되는 것이다. 현학적인 나, 오만한 나, 솔직한 나, 나르시스트, 신비주의자. 솔직하려는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적절한 처세를 가미해야 한다니. 안데스 산맥도 이렇게 첩첩산중은 아닐 거다. 이 메모는 이것 외에 적절한 대답이 있음에도 쪽팔림을 무릅쓰고 말할 자신은 없던 스스로를 격려하며 쓰는 고백이다.

A 라는 일에 이유와 명분이 있다는 것은 곧 그 일이 필요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을 말한다. 거꾸로 따져보자면 A 는 필요하지만 않다면 안 해도 될 일이다. 나는 가끔 세상 이치는 놀랍도록 정확하고 공정한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공기가 갑갑하지 않다면 환기 같은 건 안 해도 그만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갑갑해질만 하면 환기를 하는 사람이라 갑갑하지만 않다면 먼지구덩이에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강이 범람하지 않으면 댐을 짓지 않아도 되고, 자원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제국주의도 노예도 없었을 거다. 만약 내가 캄보디아로 이주를 간다면 추운 시카고살이에 필요해서 산 패딩들을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주변 환경과 자기 자신이 변함에 따라 이유 즉 필요를 망각하게 되기 때문인데, 이미 태생부터 비논리적인 미술이 이다지 세속적인 "필요"의 논리에 종속될 "필요"가 있나 석연치 않은 마음이다. 편협한 신성화 - 미술만은 다른 영역의 일들과 다른 모습으로 전개 되어야 한다 - 는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명분을 들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혹여 구실을 잃는 날이 온다면 그림을 그릴 필요성도 함께 도둑 맞진 않을까 겁을 내는 것 뿐이다. 우울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더이상 우울하지 않을 때 무슨 그림을 그릴까? 정치적인 메세지를 전하고 싶은 사람들은 나라나 이념이 없는 곳에 가서도 그림을 그릴까? 그런 경우 그림과 그리는 행위의 의미는 때에 따라 다를 것이며 나는 막연하게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그림의 영원성 혹은 초월적 성질과 사뭇 다르다고 느껴진다. 요컨대 그리기의 이유를 따지다가 그것이 당신의 원동력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오류를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이유라는 단어는 사회적 명분을 암시하는 반면 그림이라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원초적이고 야만적이고 집요하고 자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가장 포괄적인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좁은 곳이 가장 넓은 곳인 것임을 기억한다. 가장 깊은 곳이 가장 높은 곳임을 기억한다. 내가 보는 습지대가 마그마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쯤에서 드는 회한. 어차피 사람이 만드는 그림, 어디 사람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홀로 설 수 있는 사람 인 자 없는 것 처럼 홀로 그려지는, 홀로 봐지는 그림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이미 태생부터 편향적이다. 아니, 사람이 태생부터 편향적이다. 아니, 다 편향적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건 편향에서 나오는 극도의 평형이다.

그런 마음은 나로 하여금 그림에서 생산 대신에 무효화의 기능을 찾게 하는 것 같다. 생산한다는 것은 0 혹은 -에서 +로 만드는 거지만 내가 하는 것은 -와 +를 충돌시켜 0으로 만드는 것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샤면킹에 보면 무무영역무 라는 게 나오는데 그거랑 비슷한 거다. 모르면 가서 샤먼킹을 완독하고 오라. 거기 내 첫사랑 하오 오빠가 개간지 나게 나오니까. 무무영역무는 존나 쎈 놈들이 넘치는 샤먼킹 세계관에서 헤아림의 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존나 아름다운 필살기이다. 대부분의 방어기는 대동소이한 파워로 공격기를 막는 것. 그렇지만 무무영역무란 방어기를 탑재하는 대신 자기 자신이 완충제 그 자체가 되어 모든 공격을 백지화 하는 것을 말한다. 요우가 날고 기는 공격기 사이에서 한 줄기 갈대마냥 낭창낭창 거리는 작은 몸으로 모든 것을 상쇄하는 장면은 참 멋있다. 세상에 혹은 세상으로부터 공격과 방어를 감수하기보단 무아로 견뎌내는 것. 무력화, 중화, 상쇄, 백지화. 그림을 그릴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한 염색약을 중화해야 하는 것 처럼, 물 속에서 기압차를 극복하기 위해 이퀄라이징을 해야 하는 것 처럼, 밤에 잠들기 위해 낮에 깨있는 것 처럼 그저 버티기 위해 존재하는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그림 그리기. 조건부로 그림을 그리지 말자고 언제나 생각한다. 이유 없는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한다. 눈뜬 장님 같은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한다. 몸을 놀리고 있으면 치닫아오는 불안이나 걱정이 자꾸 나를 잠식하다가도 조금이라도 그림을 그리려고 아등바등 하다보면 마음이 좀 진정 된다. 난 그럴 때마다 감격스럽다. 내가 그리는 행위에 점점 더 의존적이게 되어 그림을 배신할 엄두도 나지 않는 겁쟁이가 되길 바라며, 세월이 흐를 수록 더욱 더 어쩔 수 없이 그림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또 마음 한켠으론 적막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사막이 넌더리 나면 그림을 그리면 되는 것이니 덕분에 명이 조금 길어 지는 구나 싶다.